한적하고 여유로운 분위기, 맑은 하늘, 드넓은 들판... 유럽의 소비자들이 떠올리는 '프로방스' 지방의 이미지다. 이 지역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올리비에 보쏭은 이곳의 풍부한 자연으로부터 얻은 산물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었다. 고대 프랑스 남부 전역에 걸쳐 뻗어나갔던 감각적이며 문화적인 자원이 풍부했던 지역 '옥씨따니아(Occitanaia)', 이 지역의 여자를 지칭하던 록시땅이 브랜드의 이름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록시땅의 창업자 올리비에 보쏭은 23살의 어린 나이에 낡은 증류기를 구입해 로즈 에센셜 오일 등 다양한 종류의 에센셜 오일들을 차에 싣고 프로방스 지방의 장터를 돌며 판매를 시작했다. 이후 1976년 작은 비누 공장을 시작했으며, 이는 결국 프랑스 자연주의 화장품의 효시 '록씨땅'의 시작이 되었다.
시장은 전쟁터다. 전쟁의 승리를 위한 핵심 전략은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장에 택할 수 있는 최고의 전략은 보이지 않은 사람들의 생각 속 지도에서 유리한 키워드를 선점하는 것이다. 록시땅은 창업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프로방스'라는 키워드를 그들의 것으로 가져올 수 있었다. 수없이 많은 자연주의 화장품의 물결 속에서 나름의 아이덴티티를 굳건히 지킬 수 있었던 이유다. 그렇다면 이니스프리는 어떨까? 이니스프리의 브랜드 명은 예이츠의 시구에 나오는 어느 신비한 섬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니스프리 하면 제주를 먼저 떠올린다. 그들의 브랜드 슬로건을 보면 이러한 설명은 더욱 선명해진다. 'Natural benefits from JEJU', 제주의 청정한 자연에서 얻은 산물들을 나누겠다는 이 브랜드의 카피는 제품명으로 그대로 이어진다. 그린티 씨드 세럼, 용암해수 에센스, 왕벚꽃 톤업 크림, 한란 로션, 유채꿀 핸드 버터, 화산송이 모공 폼... 이름만 들어도 제주가 떠오른다. 푸른 바다, 구멍 송송 뚫린 화산석, 드넓은 녹차밭까지. 그렇다. 이니스프리는 전 세계 사람들의 생각 속 청정 섬 제주를 완벽하게 선점한 것이다.
전략이 선명하니 전술의 실행도 심플해진다. 브랜드 아이덴티티가 선명하니 슬로건 역시 분명해진다. 제품명은 말할 것도 없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청정 섬의 이미지를 어떻게 온라인 마케팅 전략의 실제로 활용할 것인가의 여부다. 이 차이는 이니스프리가 운영하는 인스타그램 채널을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이니스프리의 과거 운영 전략은 한 마디로 판매를 위한 세일 전략이었다. 그 안에서 '이니스프리'만의 아이덴티티를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여타 유사한 브랜드의 인스타그램 채널과의 구별도 힘들었다. 목적(전략)이 비슷하니 그 방법(전술) 역시 비슷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니스프리는 이후 인스타그램의 운영 전략을 완전히 바꾸게 된다. 청정 섬 제주의 톤앤매너를 그대로 살린 콘텐츠들로 전혀 새로운 시도를 과감히 시작한 것이다. 새로운 이니스프리 인스타그램 계정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제주의 자연, 그 자체이다. 모델과 제품은 주인공의 품에 안긴 조연의 역할을 한다.
하지만 성공한 영화나 드라마의 조건은 이 조연들이 살아날 때이다. 이질감 없이 자연스럽게 녹아든 조연의 역할은 작품 전체를 살리곤 한다. 이 뿐만이 아니다. 이니스프리는 소비자들의 리얼 후기를 피드에 리그램했다. 소비자의 시각에서 바라본 감성적인 피드로 채널을 재구축한 것이다. 이니스프리의 인스타그램을 따라가다 보면 제주에 가고 싶어 진다. 사람과 자연과 제품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모습에 나도 모르게 마음을 빼앗긴다. 계절을 따라 자연스럽게 바뀌는 이미지의 톤 앤 매너는 이니스프리의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품은 제품들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세일을 강조하는 카피나 숫자는 찾아보기 어렵다. 가끔씩 아주 수줍게 이벤트의 존재만을 알릴 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니스프리의 과감한 방향 전환은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2019년도 아모레퍼시픽 그룹의 3분기 매출은 1조 5704억 원을 기록했다. 영업이익은1205억 원,지난해 동기 대비 매출은 7.4%, 영업이익은 42.3% 증가한 금액이다. 이니스프리의 뚝심이 실적으로 드러난 셈이다. 분명한 컨셉의 힘은 이렇게도 강력한 것이다.
아모레퍼시픽의 제주 사랑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1983년, 아모레퍼시픽의 고 서성환 회장은 제주의 15만 평 땅을 개간하여 녹차밭을 만들었다. 우리나라만의 차 문화가 없음을 개탄한 창업자의 의지의 결과였다. 이제 이 녹차밭들은 이름 모를 오름들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스카이라인과 초록의 찻잎들로 제주만의 기운을 자아내는 명소가 되었다. 이니스프리의 컨셉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수십 년간의 보이지 않는 투자가 만들어낸 이유 있는 발견이다. 그 청정의 컨셉을 머금은 이니스프리의 소셜 마케팅 전략이 지향해야 할 방향 역시 제주 그 자체 라야 한다. 사람들은 이니스프리라는 제품만을 구매하지 않는다. 제주라는 대체 불가의 청정의 이미지도 함께 소비하는 것이다. 이 전략이 무서운 점은 카피가 불가하다는 것이다. 어느 회사나 브랜드도 이니스프리의 제주를 뺏을 수 없다. 이것이 브랜드 컨셉의 선점 전략이 가진 보이지 않는 힘이다. 이니스프리의 인스타그램 피드만이 독점할 수 있는 가장 큰 자원이다. 사람들은 지금도 이니스프리의 피드에서 제주의 자연을 찾는다. 의도된 전략의 결과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이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브랜드, 컨셉의 강력한 숨은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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